아버지의 묵을 물려받겠다고 나선 장남 혁진 씨. 계룡산 아래, 한 식당에선 매일 새벽 특별한 후계 수업이 시작된다.
방송일: 2026. 6. 26. | KBS 인간극장


- 새벽 네 시, 아직 어두운 부엌에 켜지는 불
- 반쪽이 닳아 없어진 아버지의 나무 주걱
- 도토리나무가 덮고 있던 낡은 컨테이너 집의 기억
- 젊은 며느리의 새로운 시도 앞에서의 미소
- 새 솥단지를 아들의 트럭에 실어주던 아침
새벽 네 시, 불이 켜진 솥단지 앞
이른 새벽. 세상이 아직 어둠 속에 잠겨 있을 때 식당 부엌에는 옅은 불빛이 켜진다. 커다란 솥단지 앞, 수십 년째 같은 자리에 서 있는 남자가 있다. 재성 씨다.
그는 불을 켜기 전 잠시 시계를 본다. 이내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헐레벌떡 뛰어들어오는 발소리가 부엌을 채운다.
타박하는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지 않다. 멋쩍은 웃음소리와 함께 아들 혁진 씨가 솥 앞으로 다가선다. 새벽잠을 떨치고 일어났지만, 수십 년 몸에 밴 아버지의 부지런함을 따라가기엔 아직 한참 멀었다.
혁진 씨의 손에 묵직한 나무 주걱이 쥐어진다. 아버지가 묵을 저을 때 쓰던 것을 물려준 것이다. 주걱 끝을 가만히 보면 사선으로 비스듬히 닳아 있다. 23년 동안 뜨거운 바닥을 긁어내며 원래 길이의 반이나 닳아 없어진 흔적이다. 혁진 씨는 그 주걱을 볼 때마다 입술을 굳게 다물게 된다.
도토리묵을 쑤는 일은 고기를 굽는 것과 다르다. 한순간이라도 꾀를 부리거나 주걱질을 멈추면 바닥이 타버린다. 그러면 그 솥 하나를 통째로 버려야 한다.
아버지의 시선은 묵의 찰기를 향해 있고, 아들의 시선은 그런 아버지의 굳은 입매를 향해 있다. 불을 줄였다 높였다 하며 꼬박 한 시간을 젓는다. 묵이 되직해질수록 혁진 씨의 팔뚝에는 굵은 핏대가 선다. 왜 어떤 일은 직접 땀을 흘려봐야만 그 무게를 알게 되는 걸까.
은반지 대신 묵 주걱을 쥔 손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혁진 씨의 손에는 나무 주걱 대신 가느다란 세공 도구가 들려 있었다. 그는 서울에서 8년 동안 자신만의 주얼리 브랜드를 운영하던 디자이너였다. 은을 다듬어 반짝이는 반지를 만들던 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지붕에서 떨어져 허리를 크게 다쳤다. 병원에 누운 아버지는 무심하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혁진 씨는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평생 자신들을 키워낸 아버지의 묵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이 실감 났다. 아버지는 반대했다. 잘하고 있는 일을 왜 굳이 그만두려 하냐며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아들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은 대신 도토리를 선택했지만, 정성을 빚어내는 일만큼은 다르지 않다고 그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묵을 쑤는 일은 속성 과정이 없다. 그날의 온도, 습도에 따라 물의 양이 미세하게 달라지고 불의 세기가 변한다. 아버지는 그것을 말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저 수십 년의 감각으로 알 뿐이다. 아들은 그 침묵의 감각을 훔쳐 배우기 위해 매일 새벽 뜨거운 김을 쐰다.
도토리나무가 덮고 있던 낡은 지붕
오후 3시. 식당 영업이 끝나면 부부는 산책을 나선다. 두 사람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식당 뒤편 산골 마을의 허름한 집 앞이다. 20년 전, 묵 장사를 처음 시작했던 곳이다.
한참을 말없이 집을 바라보던 아내 창미 씨가 돌연 고개를 돌리며 눈시울을 붉힌다.
잘 나가던 건설업이 IMF로 무너졌다. 이사를 전전하다 마지막으로 닿은 곳이 고향 공주의 산골 마을이었다. 마당 한편에 컨테이너를 놓고 오형제와 살았다. 겨울이면 찬물에 손을 담가 묵 그릇을 닦았다.
그래서 부부는 도토리를 볼 때마다 가슴이 저릿하다. 도토리는 그들에게 음식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 내밀어진 동아줄이었다.
마침내 아들에게 내어준 자리
주말 저녁, 식당 부엌에 낯선 냄새가 퍼진다. 며느리 서리 씨가 앞치마를 두르고 섰다. 말린 묵을 데쳐 오이와 무치고, 떡볶이에도 묵을 넣었다. 며느리만의 새로운 레시피다.
완성된 요리가 밥상에 올랐다. 시아버지 재성 씨가 젓가락을 들어 조심스레 묵을 집는다. 가족들의 시선이 모두 아버지의 입가로 향한다. 길게 이어지는 침묵. 이내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전통만을 고수하던 아버지의 얼굴에 번진 환한 미소. 며느리의 새로운 시도 앞에서 아버지는 기꺼이 자리를 내어준다. 다음 날, 며느리의 아이디어로 만든 '컵 묵밥'을 들고 아들 내외는 서울의 한 행사장으로 향하기로 했다.
출발을 앞둔 아침, 재성 씨가 아들의 트럭 뒤편으로 무거운 상자들을 들고 온다.
처음으로 혼자 묵을 팔러 나서는 아들을 위해 준비한 새 장비들이다. 자신이 숱한 실패를 겪으며 태워 먹었던 시간들을 아들은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묵직한 솥단지를 넘겨주는 아버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트럭의 시동이 걸리고, 차가 멀어져 간다. 재성 씨는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골목길을 바라보고 있다.
어느새 부엌에는 다시 묵 끓는 냄새가 피어오른다. 아버지가 쑤어온 찰진 세월이 이제 아들의 솥단지 안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세상은 여전히 조용하고, 묵은 뜨겁게 익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