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극장] KBS 260625 방송 아들아 묵을 쑤어라 5부: 새벽에 쓴 편지 한 장, 식지 않는 온기를 담아

부모님과 함께 주방 식기를 사러 간 혁진 씨. 재성 씨는 주방 식기들을 마련해주고 마지막으로 응원과 함께 주걱을 건넨다.

방송일: 2026. 6. 26. | KBS 인간극장

부모님과 함께 주방 식기를 사러 간 혁진 씨. 재성 씨 장면1부모님과 함께 주방 식기를 사러 간 혁진 씨. 재성 씨 장면2부모님과 함께 주방 식기를 사러 간 혁진 씨. 재성 씨 장면3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장미 축제장. 만 삼천 원짜리 화분을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여자는 식어가는 도시락을 뒤로한 채 쉴 새 없이 목소리를 높입니다. 며칠 뒤 수술대에 올라야 하는 남편의 병원비라는 무거운 현실을 씩씩한 웃음으로 감춰낸 산골 부부. 말하지 못했던 깊은 진심이 낡은 종이 한 장에 쓰이던 어느 묵묵한 하루를 가만히 따라가 봅니다.
  • 축제장 한구석, 식어가는 밥 앞에서도 손님을 향해 웃는 아내
  • 낡은 옷깃의 노모와 마주 앉아 가위로 툭툭 잘라낸 짜장면 한 그릇
  • 수술을 앞둔 텅 빈 다방, 홀로 서툴게 끓여내는 커피 반 잔의 온도
  • 투박한 하얀 봉투에 꾹꾹 눌러 담은 마음, 그리고 소리 없는 눈물

식어가는 밥과 만 삼천 원의 장미

이른 아침부터 광장은 소란스러웠다. 대형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와 사람들의 발소리가 뒤섞이는 사이, 천막 아래 여자의 손길이 분주해졌다. 흙이 잔뜩 묻은 목장갑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 곁에서 조심스럽게 무거운 화분 상자를 나르는 남자의 안색은 조금 창백했다. 간암 판정을 받고, 며칠 뒤 큰 수술을 위해 병원으로 향해야 하는 몸이었다.

태양이 정수리를 뜨겁게 달굴 무렵, 남자가 양손 무겁게 비닐봉지를 들고 나타났다. 읍내 식당에서 사 온 점심 도시락이었다. 김이 몽글몽글 서려 있는 플라스틱 뚜껑을 열며 남자가 여자의 앞치마 끈을 살짝 당겼다.

"내가 할 테니까 당신 밥 먹어요, 일단."

하지만 여자의 시선은 이미 진열대 앞을 서성이는 사람들의 발끝에 가 있었다.

"잠깐만 진열해 놓고. 나 마음 편안할 때 먹을게."

여자는 목장갑을 벗지도 않은 채 진열대 앞으로 다가갔다. 미니 장미의 잎을 조심스럽게 쓸어 올리며 손님을 향해 한껏 목소리를 높였다.

"이거 자르면 또 나오고, 자르면 또 나오는 애라서… 만 삼천 원이 아깝지 않아요. 향기 좋은 거 찾으시면 이거 한번 맡아보세요."

사람들은 왜 비슷한 순간을 반복해서 떠올릴까요. 어쩌면 그 평범한 풍경 속에 가장 숨기고 싶었던 절박함과 짙은 사랑이 얽혀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설명이 길어질수록 용기 안에 담긴 반찬들은 조금씩 윤기를 잃어갔다.

남자는 더 이상 밥을 먹으라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한 걸음 물러선 채, 쉴 새 없이 허리를 굽히는 아내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남편의 수술비를 벌기 위해 아내는 지금 만 삼천 원짜리 장미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는 것을, 남자는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아내가 흘리는 땀방울은 살기 위한 안간힘이다. 결코 쓰러질 수 없기에 그녀는 따뜻한 밥 한 술보다 낯선 손님을 먼저 챙겨야만 했다.

짜장면을 자르는 가위 소리

오후가 되자 남자는 낡은 트럭을 몰고 산길을 올랐다. 홀로 지내는 어머니의 집이었다. 수술하러 병원에 들어가면 한동안 찾아뵙지 못할 터였다. 곱게 접어두었던 색바랜 외출복을 챙겨 입고 청마루에 앉아 있던 노모가 아들을 보자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시내로 나가 마주 앉은 식당. 점심 메뉴는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짜장면이었다. 구석 자리에 마주 앉은 모자 사이로는 한동안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났다. 검은 춘장이 입가에 묻은 줄도 모른 채, 노모가 툭 끊어지는 목소리로 불쑥 말을 꺼냈다.

"내 간을 떼서 너를 주면 안 되냐. 내 나이 먹어도 내장 하나는 튼튼해. 막 잡아먹어도 체하지도 않잖아."

남자는 말없이 식탁 위에 놓인 가위를 집어 들었다. 그릇 안에서 엉켜있는 면발을 서걱서걱 잘라냈다. 시선을 여전히 그릇에 고정한 채, 남자가 무심히 대꾸했다.

"아유, 어머니 연세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셔."

"수술 의사가 많이 좋아졌다고, 별거 없으니까 잘할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하는 거예요.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세요."

서로를 안심시키려는 투박한 거짓말들이 까만 춘장처럼 버무려졌다. 효도가 별건가. 그저 좋아하는 짜장면을 먹기 좋게 가위로 잘라드리며 곁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 남자는 짧아진 면발을 젓가락으로 밀어 넣으며 뜨거운 속을 꾹꾹 삼켜냈다.

* * *

아내가 없는 다방의 커피 반 잔

해 질 녘 산골짜기 동작골로 돌아온 남자는 텅 빈 음악 다방 문을 열었다. 산나물 전을 부치며 늘 곁을 지키던 아내가 없는 공간은 유독 넓고 서늘했다. 턴테이블 바늘을 점검하고 마이크 앞에 앉아 테스트를 해보지만, 밖에서 소리를 들어주고 조율해 줄 사람이 없으니 쇳소리만 맴돌았다.

딸랑, 종소리와 함께 낯선 손님이 들어섰다. 주문을 받은 남자가 다급히 컵을 꺼내 들고는 한 손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축제장에 있는 아내에게 거는 전화였다.

"여보, 이거 따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

"잔에 반 붓고, 뜨거운 물 섞어서… 아, 그러면 온도가 맞을까? 알았어. 절반."

서툰 손놀림으로 커피를 내리고 물을 붓는다. 찰랑거리는 수면 위로 하얀 김이 피어오른다. 아내가 곁에 있을 때는 공기처럼 당연했던 사소한 일상들이, 홀로 남겨진 순간 거대한 벽처럼 남자를 덮쳐온다.

막상 돌아보면 별것 아닌 장면인데 이상하게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습니다. 손님에게 무사히 커피를 내어준 뒤, 남자는 구석 자리로 가 작은 수첩을 펼쳤다. 50년을 디제이로 살아오며 숱한 사연을 읽어냈지만, 정작 자신의 진심을 종이에 옮기는 일은 더디기만 했다. 수술실에 들어간 뒤 만에 하나 깨어나지 못한다면, 남겨질 아내에게 쥐여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볼펜 끝이 누런 종이 위를 구르다 멈추기를 수십 번. 화려한 미사여구는 지워졌다. 그저 흙냄새 나는 투박한 진심만이 삐뚤빼뚤한 글씨로 채워지고 있었다.

수술하러 가는 날.
내가 이 채소밭에 다시 서는 날.
그때도 밭고랑에 잡초가 무성하다면, 여전히 농사에 서툰 네가 짓고 있다는 얘기.
내가 구루마로 수없이 돌을 나르던 사잇길에, 괭이 자루가 부러진 채 나뒹군다면…
뒷손 없는 아내가, 기다림을 꽃밭에 심고 있다는 얘기.

남자는 다 쓴 편지를 여러 번 매만지다 고이 접어 하얀 봉투에 넣었다. 늘 생활비는 아내가 관리했기에 남자의 주머니는 가벼웠다. 얇은 봉투를 건네면 아내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투박한 봉투에 눌러 쓴 천금

다음 날, 여전히 붐비는 축제장 천막 뒤편에 낡은 플라스틱 의자 두 개가 놓였다. 햇볕을 피해 얼음물 한 모금을 들이켜는 짧은 휴식 시간. 남자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꼬깃꼬깃한 하얀 봉투 하나를 탁자 위로 툭 밀어놓았다.

"이게 뭐야? 꽃 팔러 갔다 오더니 돈 좀 벌었다고 돈 봉투 주는 거야?"

여자가 땀방울이 맺힌 얼굴로 장난스레 핀잔을 주었다. 남자는 멋쩍게 입꼬리를 올리며 툭 내뱉었다.

"수고비야. 천금보다 더 한 거. 천금 만금."

별 기대 없이 봉투를 열어본 여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멈췄다. 지폐 한 장 없이 들어있는 낡은 종이. 그 안에 빼곡히 적힌 남편의 시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던 여자의 턱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내 붉게 달아오른 눈시울 위로 굵은 방울이 툭 떨어졌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여자는 흙 묻은 소매로 연신 눈가를 훔쳐냈다. 악착같이 꽃을 팔며 웃어 보이던 다부진 모습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남자는 소리 없이 우는 아내의 어깨를 두드리지 않았다. 그저 맞은편에 가만히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붉은 장미 덩굴을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굳이 소리 내어 위로하지 않아도 가닿는 마음들이 있었다. 천막을 흔드는 초여름의 바람 속에, 산골 부부의 고요한 시간이 겹겹이 쌓여가고 있었다.

왜 우리는 가장 간절한 마음을 끝내 글로 남기게 될까요.
목소리는 떨림을 감추지 못하고, 눈빛은 두려움을 숨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차마 소리 내어 뱉을 수 없는 무거운 마음들은 결국 입술 대신 손끝을 통해 세상에 나옵니다.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조각들이 왜 그토록 오래 마음에 머물까요.
부러진 괭이 자루, 식어버린 도시락, 서투르게 내린 커피 한 잔. 그 투박한 흔적들 속에는 나를 대신해 빈자리를 채워주길 바라는 누군가의 시선이 묻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신의 오늘에는 어떤 흔적이 남겨져 있나요.
찬찬히 둘러보면, 누군가가 당신을 위해 말없이 쌓아둔 작은 온기 하나쯤은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축제장 구석에 놓여 있던, 식어가는 밥 한 그릇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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