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병 중인 남편을 위해 아내 민서 씨는 장미축제에 나가 돈을 벌고. 남편 상아 씨는 애쓰는 아내를 위해 마음을 담아 시 한편을 적어본다.
방송일: 2026. 6. 18. | KBS 인간극장


- 축제장 한구석, 식어가는 도시락 앞에서도 손님을 놓지 못하는 아내
- 물소리조차 두려웠던 시간을 건너며 쌓아 올린 7년의 돌담
- 낡은 옷깃의 노모와 마주 앉아 가위로 잘라낸 짜장면 한 그릇의 먹먹함
- 수술을 앞둔 빈 다방, 홀로 남겨진 남편이 써 내려간 편지 한 장
식어가는 밥과 만 삼천 원의 꽃
이른 아침부터 광장은 부산스러웠다. 천막이 세워지고 플라스틱 의자가 깔리는 사이, 여자는 부지런히 화분들을 매대 위로 옮겼다. 흙이 묻은 목장갑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곁에서 무거운 상자를 나르는 남자의 움직임이 조심스럽다. 며칠 뒤면 큰 수술을 위해 병원으로 향해야 하는 몸이다.
햇볕이 정수리를 뜨겁게 달굴 무렵, 남자가 양손 무겁게 비닐봉지를 들고 나타났다. 읍내에서 사 온 점심 도시락이었다. 김이 서려 있는 플라스틱 뚜껑을 열며 남자가 여자의 옷자락을 살짝 당겼다.
"내가 할 테니까 당신 밥 먹어요, 일단."
하지만 여자의 시선은 이미 진열대 앞을 서성이는 사람들에게 가 있었다.
"잠깐만 진열해 놓고. 나 마음 편안할 때 먹을게."
"이거 자르면 또 나오고, 자르면 또 나오는 애라서… 만 삼천 원이 아깝지 않아요. 향기 좋은 거 사시려면 이거 한번 맡아보세요."
사람들은 왜 비슷한 순간을 반복해서 떠올릴까요. 어쩌면 그 장면 속에 가장 숨기고 싶었던 절박함과, 가장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사랑이 동시에 담겨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설명이 길어질수록, 밥 위에 얹힌 반찬들은 조금씩 윤기를 잃어갔다. 남자는 더 이상 밥을 먹으라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한 걸음 물러선 채,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아내의 굽은 등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남편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내는 지금 만 삼천 원짜리 장미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는 것을, 남자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물소리가 두려웠던 시간들
남자가 아내를 이토록 애틋하게 바라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 부부가 산골짜기 동작골로 들어오게 된 것은 어떤 낭만이나 여유 때문이 아니었다. 살기 위해서, 정확히는 죽지 않기 위해서였다.
오래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아이가 바다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날 이후 여자는 정신을 놓았다. 삶의 이유가 통째로 뜯겨 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무서운 환청뿐이었다.
"우리 딸이 바다에서 사고가 났기 때문에… 그 물소리가 너무너무 무서웠어요."
계곡에서 흐르는 작은 물소리만 들어도 여자는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그런 아내를 살려낸 것은 남편이었다. 남자는 산비탈을 깎고 구루마로 끝없이 돌을 실어 날랐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땅을 고르고 꽃을 심으며, 부서진 아내의 마음 주변에 단단한 돌담을 쌓았다.
이제 여자는 흔들리지 않는다. 자신과 같은 병을 앓던 남편의 친한 후배가 최근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여자는 무너져 내리는 남편을 단단하게 붙잡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계속 살아갈 거예요. 그리고 저는 어떻게 해서든 남편을 살릴 겁니다."
남편이 자신을 살려냈듯, 이제는 자신이 남편을 살려낼 차례라는 것을 여자는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짜장면을 자르는 가위 소리
오후가 되자 남자는 트럭을 몰고 어머니의 낡은 집을 찾았다. 수술하러 병원에 들어가면 한동안 찾아뵙지 못할 터였다. 빛바랜 고운 옷을 챙겨 입고 청마루에 앉아 있던 노모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점심 메뉴는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짜장면이었다. 동네 중국집 구석 자리에 마주 앉은 모자 사이로 한동안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났다. 검은 춘장이 입가에 묻은 줄도 모른 채, 노모가 툭 끊어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간을 떼서 너를 주면 안 되냐. 내 나이 먹어도 내장 하나는 튼튼해. 막 잡아먹어도 체하지도 않잖아."
남자는 가위를 들어 엉킨 면발을 서걱서걱 잘라냈다. 시선을 그릇에 고정한 채, 남자가 짧게 대꾸했다.
"아유, 안 돼요. 어머니 연세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셔."
"수술 의사가 많이 좋아졌다고, 별거 없으니까 잘할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하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서로를 안심시키려는 거짓말들이 춘장처럼 까맣게 버무려졌다. 효도가 별건가. 그저 좋아하는 짜장면을 가위로 잘라드리며 곁에 앉아 있는 것. 남자는 짧아진 면발을 젓가락으로 밀어 넣으며 묵묵히 속을 삼켰다.
아내가 없는 다방의 커피 반 잔
다시 산골로 돌아온 남자는 홀로 음악 다방 문을 열었다. 매일 아내가 함께 지키던 공간이다. 마이크 앞에 앉아 테스트를 해보지만, 밖에서 소리를 들어주고 조율해 줄 아내가 없으니 영 엉망이다.
딸랑, 종소리와 함께 손님이 들어섰다. 턴테이블 바늘을 올려놓기도 전에 주문이 밀려든다. 급해진 마음으로 남자가 수화기를 들었다. 축제장의 아내에게 거는 전화다.
"여보, 이거 따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
"잔에 반 붓고, 뜨거운 물 섞어서… 아, 그러면 온도가 맞을까? 알았어, 절반."
손님들에게 커피를 내어주고 난 뒤, 남자는 구석 자리로 가 작은 수첩을 꺼냈다. 아내에게 남길 시 한 편을 적어볼 참이다. 수술실에 들어간 뒤 만에 하나 돌아오지 못한다면, 남겨질 아내에게 쥐여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볼펜 끝이 종이 위를 구르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화려한 미사여구는 없었다. 그저 흙냄새 나는 진심만이 삐뚤빼뚤한 글씨로 채워지고 있었다.
수술하러 가는 날.
내가 이 채소밭에 다시 서는 날.
그때도 밭고랑에 잡초가 무성하다면, 여전히 농사에 서툰 네가 짓고 있다는 얘기.
내가 구루마로 수없이 돌을 나르던 사잇길에, 괭이 자루가 부러진 채 나뒹군다면…
뒷손 없는 아내가, 기다림을 꽃밭에 심고 있다는 얘기.
남자는 다 쓴 편지를 고이 접어 하얀 봉투에 넣었다. 주머니에는 늘 돈이 없었다. 생활비는 모두 아내가 관리했으니까. 봉투를 내밀면 아내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투박한 봉투에 담은 천금
다음 날, 여전히 붐비는 축제장 천막 뒤편. 플라스틱 의자 두 개를 놓고 부부가 마주 앉았다. 햇볕을 피해 얼음물 한 모금을 들이켜는 짧은 휴식 시간. 남자가 주머니에서 하얀 봉투 하나를 툭 밀어놓았다.
"이게 뭐야? 꽃 팔러 갔다 오더니 돈 좀 벌었다고 돈 봉투 주는 거야?"
여자가 장난스레 핀잔을 주었다. 남자는 멋쩍게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수고비야. 천금보다 더 한 거. 천금 만금."
별 기대 없이 봉투를 열어본 여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지폐 대신 들어있는 낡은 종이 한 장. 그 안에 빼곡히 적힌 남편의 시를 읽어 내려가던 여자의 눈시울이 이내 붉게 달아올랐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여자는 한참 동안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씩씩하게 꽃을 팔던 다부진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남자는 울먹이는 아내의 어깨를 토닥이지 않았다. 그저 맞은편에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장미 덩굴을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굳이 소리 내어 위로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들이 있었다. 천막을 흔드는 초여름의 바람 속에, 부부의 고요한 시간이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