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극장] KBS 260622 방송 아들아 묵을 쑤어라 1부:

아버지의 묵을 물려받겠다고 나선 장남 혁진 씨. 혁진 씨가 묵을 배운 지도 어느덧 1년째지만, 아버지의 평가는 혹독하기만 한데...

방송일: 2026. 6. 22. | KBS 인간극장

아버지의 묵을 물려받겠다고 나선 장남 혁진 씨. 혁진  장면1아버지의 묵을 물려받겠다고 나선 장남 혁진 씨. 혁진  장면2아버지의 묵을 물려받겠다고 나선 장남 혁진 씨. 혁진  장면3
새벽 네 시, 아버지는 이미 나와 있다. 23년째 도토리묵을 쑤는 아버지와, 주얼리를 내려놓고 주걱을 쥔 아들. 묵 한 소쿠리에 담긴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
  • 아버지보다 항상 한 발 늦게 나오는 아들의 새벽
  • 20년 쓰다 끝이 닳아진 주걱을 아들에게 넘기는 날
  • 반지를 만들던 손이 묵을 쑤기로 한 이유
  • 일주일에 반을 떨어져 사는 신혼부부
  • 20년 만에 처음 장사하던 골목 앞에 선 부부

아버지는 항상 먼저 나와 있다

새벽이 밝기 전부터 재성 씨는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수십 년째, 이 시간이면 늘 같은 자리다. 솥 앞에, 주걱을 쥔 채로. 아들을 기다리면서.

조금 뒤 혁진 씨가 나타난다. 눈이 아직 덜 떠진 얼굴이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냥 지켜본다.

아버지 거의 뭐 잠을 거의 안 주무시는 수준이라서, 항상 먼저 나와 있어요. 새벽마다.

혁진 씨 손에는 새 주걱이 들려 있다. 묵수업을 시작하면서 아버지가 새로 사준 것이다. 아버지 주걱은 20년이 넘었다. 앞부분이 닳고 닳아 한참이 없어졌다. 그게 제일 중요한 연장이라고 했다. 아빠가 주는 의미도 있다고.

낡은 주걱과 새 주걱. 같은 모양인데 길이가 다르다. 20년치 새벽이 그 차이에 담겨 있다.

한 순간도 방심하면 안 된다

도토리묵을 쑤는 일은 겉으로 보면 단순하다. 저으면 된다. 그런데 한 시간을 멈추지 않고 저어야 한다. 불을 높였다 줄였다 하면서, 묵의 점도를 손끝으로 읽어가면서.

주걱질을 멈추면 바닥에 눌러붙어 타고, 젓는 속도가 늦어지면 덩어리가 생긴다. 묵의 결이 달라진다. 고기와 달리 어려운 작업이라고 재성 씨가 말했다. 물하고 배합하는 거, 불 조절, 시간. 이게 다 맞아야 한다.

"이게 굉장히 쉬워 보여도, 보면 한 번만 보면 할 거 같아도, 그렇지가 않아요."

혁진 씨가 잠깐 딴생각을 했다. 아버지가 말한다.

"정신 차려."

두 글자. 그걸로 충분하다.

어린 시절 요령 피우다 묵이 타면 아버지한테 엄청 혼났다고 했다. 지금도 그 무게는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꼬박 한 시간을 저으면 묵이 가장 맛있어지는 순간이 온다. 아버지의 합격 사인이 떨어진다. 반나절을 식히면 찰진 도토리묵이 완성된다.

반지를 내려놓고 주걱을 쥔 이유

혁진 씨는 6개월 전까지 주얼리 디자이너였다. 8년 동안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었다. 제법 자리도 잡아가고 있었다.

3년 전, 아버지가 지붕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쳤다. 어느 날 아버지가 말했다. 이제 사람 그만해야겠다고. 혁진 씨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무 아까웠다고 했다. 이게 없어진다고. 그 전까지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아버지는 처음에 반대했다. 잘하고 있는 일이 있는데 왜 굳이 지금 하려느냐고. 그래도 혁진 씨는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처음 그만둔다고 결정을 했는데, 그거를 공지를 못했어요. 너무 아쉬워서."

서울 작업실로 갔다. 친구들 결혼 반지를 마지막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이미 넘긴 작업실에 하루만 빌려달라고 했다. 손이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줄로 갈고, 불로 달구고, 은이 반짝이게 다듬는 일.

"반짝이는 은 대신 묵을 선택했지만, 정성을 빚어내는 일만큼은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혁진 씨는 집에서 모카포트로 커피를 내려 마신다. 편한 머신이 있어도. 편하고 간단한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고 했다. 사람을 조금 바보처럼 만드는 것 같다고.

그러고 보면 도토리묵과 닮았다. 불 조절과 타이밍, 손으로 느끼는 감각.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것들.
* * *

일주일에 반을 떨어져 사는 신혼부부

혁진 씨는 서울에 산다. 결혼한 지 1년도 안 됐다. 삼척과 서울을 오가며 묵수업을 받고 있다.

아내 서리 씨가 지켜본다. 남편이 점점 지쳐가는 게 보인다고 했다. 운전도 원래 이렇게 많이 안 하는데, 왔다 갔다 하면서 계속 운전하고. 항상 피곤하고.

"오빠의 힘듦이 다 나에게 오잖아."

아들이 떠나고 난 식당. 재성 씨가 아내 창미 씨한테 말한다.

"오늘도 우리 둘 남았네."

40년 부부다. 아들이 왔다 가면 아쉬워할 줄 알았더니, 두 사람이 오히려 신나 보인다. 우리 둘이 있으면 너무 좋다고. 그 말도 비밀이라고 했다.

오후 3시 식당 영업이 끝나면 손을 꼭 잡고 산책을 나선다. 오늘은 식당 뒤편 산골 마을로 올라갔다.

20년 만에 처음 장사하던 골목 앞에서

산길을 걷다가 재성 씨가 발을 멈췄다. 낡은 집 앞이었다.

"처음으로 묵 장사를 시작한 집이야. 여기다 싱크대 놓고, 겨울에도 찬물에다가 무구루를 닦고."

창미 씨도 멈췄다. 20년 만에 올라온다고 했다. 그렇게 멀지도 않은데.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

왜 그런지 말하지 않았다. 그냥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재성 씨도 옆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그 골목이 기억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20년 동안 매일 새벽 그 자리를 지킨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 옆에 항상 누군가가 있었다.
왜 어떤 일은 대신해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물려주고 싶어질까요.
주걱 끝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저은 사람은 그 감각을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직접 쥐어주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을 겁니다.
좋아하는 일을 내려놓는 게 가능한 일일까요.
혁진 씨는 그걸 못했다고 했습니다. 공지를 못했다고. 그래도 결국 내려놨습니다.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고 했고, 그게 무엇인지는 직접 말하지 않았습니다.
20년 만에 처음 장사하던 골목에 서면 무슨 생각이 날까요.
창미 씨는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기억은 말로 꺼내는 것보다 그냥 그 자리에 서 있는 편이 나을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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