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로 딸을 잃고 슬픔에 빠진 부부. 도시를 떠나 동작골에 자리를 잡은 부부는 하나하나 직접 돌을 쌓아 지은 산골 다방을 만들었다.
방송일: 2026. 6. 15. | KBS 인간극장


- 이슬 맺힌 머위잎을 꺾으며 시작되는 산골의 아침
- 만 오천 장의 오래된 음반이 쌓인 골짜기 음악 다방
- 일곱 해 전, 먼저 떠난 딸을 위해 심은 왕벚나무의 위로
- 식은 나물을 다듬는 노모와 밥을 나르는 아들의 저녁
- 서툰 기타 소리와 콧노래로 채워지는 밤의 시간
봄이 오면 이 산은 보물 창고가 된다
민서 씨의 손끝이 바쁘게 움직인다. 갓 피어난 여린 머위잎을 하나씩 뜯어 바구니에 담는다. 장갑에 묻은 흙을 대충 털어내고 고개를 들면, 온 산이 젖은 숨을 내쉰다.
"조금 더 뜯으면 좋겠다."
혼잣말이 이슬 맺힌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산골에 집을 짓고 들어온 지 벌써 여섯 해. 매일 아침 거저 자란 것들로 밥상을 채우고 흙을 밟는 것이 이곳의 일상이다. 왜 사람들은 번잡한 곳을 떠나 불편한 흙길을 기꺼이 걷게 되는 걸까. 어쩌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가만히 내어주는 숲의 정적이 필요해서일지도 모른다.
낡은 전축이 돌아가는 오후
집 안으로 들어서면 숲과는 전혀 다른 공기가 흐른다. 벽면을 가득 채운 낡은 레코드판. 만 오천 장의 시간들이 빼곡히 꽂혀 있다.
상아 씨의 손이 익숙하게 엘피판 하나를 빼든다. 바늘이 닿는 순간, 특유의 마찰음이 짧게 울리고 이내 오래된 노래가 흘러나온다. 라디오 피디와 디제이로 평생을 살았던 그의 몸에는 여전히 지난 시절의 템포가 배어 있다.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손님들이 낡은 소파에 자리를 잡는다.
"자,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 우리가 두고 온 그리운 그 시절로 돌아갑니다."
목소리가 낮고 차분하다. 커피 향과 섞인 노래가 창문을 넘어 굽이친 산등성이로 번진다. 특별한 음식이나 장식이 없어도, 아내가 막 부쳐낸 산나물전 한 접시면 충분하다. 어떤 기억은 낡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한 소절만으로도 선명하게 되살아나곤 한다. 사람들은 왜 잊혀진 소리를 찾아 이 먼 산골까지 찾아오는 걸까. 아마도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잠시 멈춰 쉴 수 있는 낡은 의자 하나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곱 번의 봄, 그리고 딸나무
마당 한구석, 유독 눈에 띄는 왕벚나무 한 그루가 있다. 민서 씨가 창문을 열면 가장 먼저 시선이 닿는 곳. 잡초를 뽑다 지칠 때면 그녀는 습관처럼 그 나무 그늘 아래에 앉는다.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나무 밑동을 가만히 어루만진다. 7년 전, 봄비처럼 갑작스럽게 딸이 먼 곳으로 떠났다. 스물아홉, 너무 짧은 생이었다.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하고 방에 웅크려 있던 날들. 남편은 묵묵히 배낭에 물만 챙겨 그녀를 등에 업고 산을 올랐다. 그렇게 1년을 굽이친 산맥에 기대어 울음을 삼켰다. 다시 숨을 쉬기 위해 흙을 만졌고, 딸을 곁에 두기 위해 벚나무를 심었다.
"노래야, 성훈이 언니 나무 어디 있어?"
꼬리를 흔들며 다가온 누렁이가 나무 주변을 빙글빙글 맴돈다. 민서 씨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진다.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 줄기를 쓸어내린다. 깊은 상실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곁에 두고 묵묵히 함께 살아가는 것임을 마당의 나무가 조용히 말해주고 있었다.
불이 꺼지지 않는 윗집
해름참이 되자 숲의 그림자가 마당 깊숙이 길어진다. 상아 씨가 반찬이 담긴 플라스틱 용기를 들고 익숙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앞장서는 강아지의 발소리만 흙길 위로 타닥타닥 울린다.
언덕 위 작은 집에는 늙은 어머니가 산다.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방바닥에 신문지가 넓게 깔려 있다. 구부러진 허리로 노모는 어두운 방에서 여전히 나물을 고르고 있다.
"이거 찜 한 거거든. 가자미 양념 다 한 거니까 데워서 잡수면 돼."
"혼자 걷지도 못하면서 자꾸 이런 거 고르지 말아요."
투박한 아들의 목소리에 어머니는 고개도 들지 않고 나물만 매만진다. 가난했던 시절 자식들을 먼저 보내고 하나 남은 장남. 늙은 어머니의 세상은 늦은 밤 들려오는 아들의 발소리에 맞춰 돌아간다. 식은 나물 더미 위로 거친 손이 쉴 새 없이 오간다. 대단한 위로나 다정한 말은 오가지 않는다. 그저 반찬통을 내려놓고, 쓸데없는 일을 한다며 타박하는 것. 그것이 이 모자가 서로의 굽은 등을 껴안는 유일한 방식이다.
서툰 콧노래가 밤을 채울 때
거실 한가운데, 낡은 기타를 안은 민서 씨가 조심스럽게 줄을 튕긴다. 둔탁한 소리가 허공을 가른다. 곧 다가올 산골 음악회 준비. 남편의 핀잔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오지만 부부의 입가에는 둥근 웃음이 걸려 있다.
"나 노래 못 한다고 안 한다고 했잖아."
"가수가 부르는 거랑 주인이 부르는 거랑 손님들이 느끼는 게 다르다니까."
투닥거리는 목소리가 따뜻한 차 한 잔 위로 내려앉는다. 바닥만 보고 걷던 시간은 지나갔고, 이제 그 빈자리에 서툰 기타 소리와 콧노래가 조금씩 채워지고 있다. 누군가의 삶은 아픔 속에서도 이렇게 한 발씩, 아주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