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체조를 하는 딸 유라를 응원하기 위해 유라에게 안부 전화를 거는 부부. 그런데 전화를 받는 유라의 목소리가 잔뜩 지쳤다.
방송일: 2026. 6. 30. | KBS 인간극장


- 뜨거운 햇볕 아래 길게 금이 가버린 상가 유리창 앞
- 어긋난 약속 시간 앞에서 먼저 건네는 사과와 고백
- 땅에서 90미터 떨어진 대구의 어느 고층 아파트 외벽
- 미국식 치킨 수프가 끓고 있는 저녁의 부엌
- 바다 건너 딸에게 전화를 거는 밤, 잠겨 있는 목소리
뜨거운 볕에 금이 간 유리창처럼
상가 앞 유리창에 날카로운 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쩍 갈라진 금을 따라 지영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입니다.
여름날의 직사광선이 내리쬐는 바깥과, 에어컨 바람이 서늘하게 맴도는 안쪽. 그 온도 차이를 견디지 못한 유리가 제 스스로 부풀어 오르다 결국 비명을 지르며 터져버린 자국입니다. 9년째 허공에서 유리를 만져온 지영에게 이 균열은 익숙한 현상입니다.
사람의 마음도 어쩌면 이 유리창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뜨거운 감정과 차가운 현실이 부딪힐 때, 단단해 보이던 관계에도 어느 순간 길게 금이 가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그런 순간을 그냥 지나치거나, 유리가 깨질 때까지 고집을 부리곤 합니다.
약속 시간 하나를 두고 오갔던 작은 신경전도 그랬습니다. 늦었다는 이유로 차 안의 공기가 잠시 서늘해졌을 때, 지영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팽팽하게 당겨지던 공기가 마법처럼 풀려납니다. '미안해'라는 말 한마디로 유리에 가해지던 압력을 쓱 빼버리는 사람들. 이미 한 번씩 뼈아픈 균열을 겪어본 두 사람은, 더 이상 관계에 금이 가게 두지 않습니다.
90미터 허공 아래, 끓고 있는 냄비
며칠 만에 다시 찾은 대구. 지영이 서 있는 곳은 땅에서 90미터나 떨어진 28층 아파트 옥상입니다.
안전줄 하나에 목숨을 건 선배들이 창틀에 매달려 실리콘을 쏘는 동안, 지영은 무전기를 들고 옥상과 지상을 바쁘게 오갑니다. 밧줄을 직접 타지 않는 날에도 대표의 자리는 늘 땀방울로 젖습니다. 누군가 밧줄을 탔을 때, 다른 누군가는 허드렛일을 도맡아야 일이 안전하게 끝난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시각, 남편이 허공에 매달려 있는 동안 세라는 집 근처 시장 골목을 걷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세라에게 한국의 전통 시장은 여전히 낯선 숙제입니다. 큰 수박 하나를 사고 무심코 깎아달라 말을 던졌다가, 땀 흘리는 상인의 얼굴을 보고는 황급히 제값을 치르고 맙니다. 미안한 마음에 고구마까지 덤으로 더 담은 그녀의 양손에 묵직한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 있습니다.
가장 더운 여름날, 가장 위험한 허공에서 종일 땀을 흘렸을 남편. 냄비 속의 수프가 끓어오르는 소리는, 무사히 땅으로 내려오길 바라는 아내의 조용한 기도와도 같습니다.
땀방울을 닦아내는 묽은 수프 한 그릇
현관문이 열리고 짙은 피로를 매단 남편이 들어섭니다. 코끝을 스치는 냄새에 지영의 눈이 동그라지며 콧바람을 들이마십니다.
삼계탕에 찹쌀을 넣듯, 묽은 국물 안에 파스타 면이 담겨 있습니다. 식탁에 마주 앉은 지영이 숟가락을 깊게 떠서 국물을 삼킵니다. 왜 어떤 음식은 혀가 아니라 마음으로 먼저 맛을 느끼게 되는 걸까요.
예쁜 말만 골라서 하는 남편. 그리고 그 말을 듣기 위해 하루 종일 냄비 앞을 지킨 아내. 밧줄을 타며 벌어들이는 돈으로 이들은 큰 빌딩을 사거나 화려한 차를 사지 않습니다. 그저 저녁상에 마주 앉아 국물을 나누고, "맛있다", "수고했다"는 평범한 말들을 주고받기 위해 매일 그 무서운 허공으로 출근하는지도 모릅니다.
바다 건너 들려온 잠긴 목소리
다음 날, 모처럼 시장이 아닌 옷가게를 찾은 두 사람의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세라가 옷을 몸에 대보며 거울 앞을 서성입니다.
며칠 뒤, 세라는 딸 '유라'의 체조 대회를 응원하기 위해 싱가포르로 떠날 예정입니다. 비록 전 남편과 살고 있지만, 딸의 중요한 순간에는 반드시 그 자리에 있어주고 싶은 것이 엄마의 마음입니다. 지영 역시 그런 세라의 마음을 알기에, 선뜻 지갑을 열고 가장 시원해 보이는 옷을 골라줍니다.
계산을 마친 세라가 옷가게 구석에서 딸에게 영상 통화를 겁니다.
화면은 켜지지 않고, 수화기 너머로 아이의 목소리만 작게 흘러나옵니다. 평소와 달리 꽉 잠긴 목소리. 세라의 미소가 조금씩 굳어집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대회를 앞두고 긴장한 탓일까요, 아니면 어디가 아픈 걸까요.
지영도 세라도 아무 말을 하지 못한 채 전화기만 가만히 내려다봅니다. 90미터 허공에 매달릴 때보다, 자식의 잠긴 목소리를 듣는 순간이 부모에게는 훨씬 더 아득하고 두려운 법입니다.
매미 울음소리가 멎어가는 여름밤. 가게 밖으로 나서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유난히 길게 늘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