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극장] KBS 260629 방송 밧줄로 꽁꽁 지영씨와 세라 2부: 허공에 매달린 남편을 위해 냄비를 올리는 저녁

기계체조를 하는 딸 유라를 응원하기 위해 유라에게 안부 전화를 거는 부부. 그런데 전화를 받는 유라의 목소리가 잔뜩 지쳤다.

방송일: 2026. 6. 30. | KBS 인간극장

기계체조를 하는 딸 유라를 응원하기 위해 유라에게 안부 장면1기계체조를 하는 딸 유라를 응원하기 위해 유라에게 안부 장면2기계체조를 하는 딸 유라를 응원하기 위해 유라에게 안부 장면3
때로는 작은 온도 차이가 견고한 유리를 깨뜨리기도 하고, 때로는 끓여낸 수프 한 그릇이 단단히 얼어붙은 피로를 녹이기도 합니다. 까마득한 28층 허공에서 밧줄에 매달려 하루를 견디는 남자와, 그를 위해 낯선 시장을 누비며 냄비를 불 위에 올리는 여자. 가장 아찔한 곳에서 일하며 가장 평온한 일상을 지켜내는 부부의 어느 끈끈한 하루를 따라갑니다.
  • 뜨거운 햇볕 아래 길게 금이 가버린 상가 유리창 앞
  • 어긋난 약속 시간 앞에서 먼저 건네는 사과와 고백
  • 땅에서 90미터 떨어진 대구의 어느 고층 아파트 외벽
  • 미국식 치킨 수프가 끓고 있는 저녁의 부엌
  • 바다 건너 딸에게 전화를 거는 밤, 잠겨 있는 목소리

뜨거운 볕에 금이 간 유리창처럼

상가 앞 유리창에 날카로운 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쩍 갈라진 금을 따라 지영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입니다.

여름날의 직사광선이 내리쬐는 바깥과, 에어컨 바람이 서늘하게 맴도는 안쪽. 그 온도 차이를 견디지 못한 유리가 제 스스로 부풀어 오르다 결국 비명을 지르며 터져버린 자국입니다. 9년째 허공에서 유리를 만져온 지영에게 이 균열은 익숙한 현상입니다.

"햇빛이 뜨겁잖아요. 안에는 시원하고. 온도 차가 발생하면 유리가 팽창하는데, 실리콘이 꽉 잡고 있으니까 더 이상 못 버티고 선을 그리면서 파손이 시작되는 거예요."

사람의 마음도 어쩌면 이 유리창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뜨거운 감정과 차가운 현실이 부딪힐 때, 단단해 보이던 관계에도 어느 순간 길게 금이 가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그런 순간을 그냥 지나치거나, 유리가 깨질 때까지 고집을 부리곤 합니다.

약속 시간 하나를 두고 오갔던 작은 신경전도 그랬습니다. 늦었다는 이유로 차 안의 공기가 잠시 서늘해졌을 때, 지영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너한테 오늘 확실하게 약속 시간을 얘기를 안 했나 보다. 미안해."
"왜 한숨 쉬어요?"
"아니야. 그냥 웃음이 나와요. 어이가 없어서. 자기야, 사랑해."
"미안. 응, 사랑해."

팽팽하게 당겨지던 공기가 마법처럼 풀려납니다. '미안해'라는 말 한마디로 유리에 가해지던 압력을 쓱 빼버리는 사람들. 이미 한 번씩 뼈아픈 균열을 겪어본 두 사람은, 더 이상 관계에 금이 가게 두지 않습니다.

아파본 사람만이 상처가 얼마나 깊게 파이는지 압니다. 그래서 이들은 상처가 나기 전에 먼저 고개를 숙이고, 기꺼이 사랑한다는 말로 틈을 메웁니다.
* * *

90미터 허공 아래, 끓고 있는 냄비

며칠 만에 다시 찾은 대구. 지영이 서 있는 곳은 땅에서 90미터나 떨어진 28층 아파트 옥상입니다.

안전줄 하나에 목숨을 건 선배들이 창틀에 매달려 실리콘을 쏘는 동안, 지영은 무전기를 들고 옥상과 지상을 바쁘게 오갑니다. 밧줄을 직접 타지 않는 날에도 대표의 자리는 늘 땀방울로 젖습니다. 누군가 밧줄을 탔을 때, 다른 누군가는 허드렛일을 도맡아야 일이 안전하게 끝난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시각, 남편이 허공에 매달려 있는 동안 세라는 집 근처 시장 골목을 걷고 있습니다.

"저기, 닭다리 있나요?"
"닭다리 없어요. 닭 한 마리밖에 안 팔아요."

미국에서 나고 자란 세라에게 한국의 전통 시장은 여전히 낯선 숙제입니다. 큰 수박 하나를 사고 무심코 깎아달라 말을 던졌다가, 땀 흘리는 상인의 얼굴을 보고는 황급히 제값을 치르고 맙니다. 미안한 마음에 고구마까지 덤으로 더 담은 그녀의 양손에 묵직한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 있습니다.

부엌에 선 세라가 커다란 냄비를 꺼냅니다. 닭 한 마리를 통째로 넣고, 감자와 당근을 듬성듬성 썰어 넣습니다. 그리고 치킨 스톡을 듬뿍 짜 넣습니다. 미국식 치킨 수프. 그녀의 고향에서 몸이 아플 때마다 끓여 먹던 보양식입니다.

가장 더운 여름날, 가장 위험한 허공에서 종일 땀을 흘렸을 남편. 냄비 속의 수프가 끓어오르는 소리는, 무사히 땅으로 내려오길 바라는 아내의 조용한 기도와도 같습니다.

* * *

땀방울을 닦아내는 묽은 수프 한 그릇

현관문이 열리고 짙은 피로를 매단 남편이 들어섭니다. 코끝을 스치는 냄새에 지영의 눈이 동그라지며 콧바람을 들이마십니다.

"무슨 냄새야? 치킨 수프?"
"고생했어. 빨리 먹어. 엄청 더웠지 오늘?"

삼계탕에 찹쌀을 넣듯, 묽은 국물 안에 파스타 면이 담겨 있습니다. 식탁에 마주 앉은 지영이 숟가락을 깊게 떠서 국물을 삼킵니다. 왜 어떤 음식은 혀가 아니라 마음으로 먼저 맛을 느끼게 되는 걸까요.

조미료가 넉넉히 들어갔을 그 수프를, 지영은 세상 어떤 진수성찬보다 달게 삼킵니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28층 높이의 어깨가 숟가락질 몇 번에 스르르 녹아내립니다.
"진짜 맛있다. 내가 오늘 땀 많이 흘려서 딱 이렇게 필요했어."
"그것 때문에 만들어주고 싶었어."

예쁜 말만 골라서 하는 남편. 그리고 그 말을 듣기 위해 하루 종일 냄비 앞을 지킨 아내. 밧줄을 타며 벌어들이는 돈으로 이들은 큰 빌딩을 사거나 화려한 차를 사지 않습니다. 그저 저녁상에 마주 앉아 국물을 나누고, "맛있다", "수고했다"는 평범한 말들을 주고받기 위해 매일 그 무서운 허공으로 출근하는지도 모릅니다.

* * *

바다 건너 들려온 잠긴 목소리

다음 날, 모처럼 시장이 아닌 옷가게를 찾은 두 사람의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세라가 옷을 몸에 대보며 거울 앞을 서성입니다.

며칠 뒤, 세라는 딸 '유라'의 체조 대회를 응원하기 위해 싱가포르로 떠날 예정입니다. 비록 전 남편과 살고 있지만, 딸의 중요한 순간에는 반드시 그 자리에 있어주고 싶은 것이 엄마의 마음입니다. 지영 역시 그런 세라의 마음을 알기에, 선뜻 지갑을 열고 가장 시원해 보이는 옷을 골라줍니다.

계산을 마친 세라가 옷가게 구석에서 딸에게 영상 통화를 겁니다.

"Hello? You don't do video call?"

화면은 켜지지 않고, 수화기 너머로 아이의 목소리만 작게 흘러나옵니다. 평소와 달리 꽉 잠긴 목소리. 세라의 미소가 조금씩 굳어집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대회를 앞두고 긴장한 탓일까요, 아니면 어디가 아픈 걸까요.

지영도 세라도 아무 말을 하지 못한 채 전화기만 가만히 내려다봅니다. 90미터 허공에 매달릴 때보다, 자식의 잠긴 목소리를 듣는 순간이 부모에게는 훨씬 더 아득하고 두려운 법입니다.

매미 울음소리가 멎어가는 여름밤. 가게 밖으로 나서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유난히 길게 늘어집니다.

왜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유독 더 자주 섭섭함을 느낄까요.
가장 단단히 묶여 있다고 믿기에, 작은 흔들림에도 크게 놀라는 것일지 모릅니다. 뜨거운 온도 차를 견디다 못해 깨져버리는 유리창처럼, 관계 역시 매일 닦고 보듬지 않으면 어느새 금이 가기 마련입니다. 오늘 하루, 당신의 온도 차이를 다독여준 수프 한 그릇 같은 존재는 누구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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