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극장] KBS 방송 20260605 남아공 아빠와 부산 엄마의 해피하우스 텔레비전 없는 집, 라디오로 자라는 아이들

선교 활동을 위해 남아공에서 한국으로 온 가브리엘. 3년만 한국에 있다가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한 여자를 만나고 인생이 바뀌었다는데...

방송일: 2026. 6. 5. | KBS 인간극장

선교 활동을 위해 남아공에서 한국으로 온 가브리엘. 3 장면1선교 활동을 위해 남아공에서 한국으로 온 가브리엘. 3 장면2선교 활동을 위해 남아공에서 한국으로 온 가브리엘. 3 장면3
부산 영도, 텔레비전 없는 집에 라디오 소리가 흐른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 아빠와 부산 토박이 엄마, 그리고 세 아이. 된장찌개를 주면 화를 낸다는 남자가, 13년째 이 집의 김치를 먹고 있다.
  • 고향이 그리울 때 스파게티를 해줘야 화를 면하는 남편
  • 텔레비전 대신 라디오로 자라는 삼남매
  • 아버지의 반대를 넘어 지켜낸 13년의 사랑
  • 라디오 아나운서를 꿈꾸는 첫째 아랑이의 1차 합격
  • 김천에서 올라온 외할머니의 손맛, 그리고 가족의 식탁

된장찌개를 주면 화를 내는 남자

점심시간, 지은 씨가 좋아하는 매운탕에 밥을 차렸다. 가브리엘 씨가 현관으로 들어왔다.

"오늘 많이 춥지? 어서 오세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 가브리엘 씨는 한국 생활 10년째다. 치킨, 닭매운탕, 쌈, 삼겹살, 불고기. 다 좋아한다고 했다. 안 좋아하는 음식은 청국장. 없으면 좋다고 웃으며 말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고향이 그리울 때는 적어도 스파게티는 해줘야 한다고 했다. 그럴 때 된장찌개를 주면 화를 낸다고 했다. 지은 씨가 웃으며 말했다.

겨울에도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따뜻한 나라. 부부는 한때 그 나라에 살다가 10년 전 한국으로 돌아왔다. 산 위의 집은 좁지만, 전망이 좋았다.

집안일은 같이, 13년째

지은 씨가 영어 과외를 하러 나간 사이, 가브리엘 씨가 청소를 시작했다. 힘 좋은 손길이 구석구석을 지나갔다.

"힘들잖아요."
"힘들지만, 운동이에요."

무한 긍정. 집이 반들반들해졌다.

결혼 13년, 맞벌이 부부가 그렇듯 집안일은 같이 한다. 누가 더 많이 했는지는 따지지 않는 것 같았다.
* * *

텔레비전 없는 집의 라디오

학교에서 돌아온 첫째 아랑이와 둘째 예랑이가 가방을 던지고 방으로 달려갔다. 이 집엔 텔레비전이 없다. 대신 라디오가 있다.

어릴 때부터 아빠와 영어로 대화해 온 자매는 영어 라디오 방송을 즐겨 듣는다.

"아빠가 아는 분이 여기서 일하셔서 추천해 줬어요. 영어 공부에도 좋고, 한국어도 섞여 있어서 좋아요."

모르는 노래도 신나게 들을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라디오와 음악만 있다면, 자매는 오늘도 행복했다.

치즈 스파게티 맛집

저녁은 가브리엘 씨가 준비한다. 오늘은 스파게티. 버터에 밀가루를 풀고 우유로 농도를 맞춰 직접 소스를 만들었다. 한국 식당에서는 찾기 힘든 맛이라고 했다.

채소를 볶고 마지막에 치즈를 듬뿍 녹인다. 가브리엘 표 치즈 스파게티. 여기에 김치를 곁들이는 건 이 집만의 방식이다. 아이들이 그 치즈 파게티를 너무 좋아한다고 했다.
"이거 만들 때 아빠가 힘을 많이 들였어. 당근이 없는데, 다음번엔 당근 넣어서 해줄게."

소박한 저녁이 함께라 더 맛있었다.

* * *

아버지의 반대를 넘어선 13년

선교사로 와 있던 26살 남아공 청년과 25살 부산 아가씨가 교회에서 만났다. 둘만의 언약식을 올렸다.

"눈동자에서 마음이 보였어요. 너무 맑고 순수한 사람이구나."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기대를 받고 자란 지은 씨. 하지만 가브리엘과의 사랑은 아버지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아빠가 없는 결혼식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지은 씨는, 결국 남편의 나라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시댁에 얹혀 살면서 첫째 아랑이를 낳았다. 시부모님은 딸처럼 품어주셨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아빠가 반대하고 거절하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그 분노와 아픈 마음을 남편에게 토로했고, 남편은 그걸 그대로 받아줘야 했다. 서로에게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3년이 지나고, 아버지가 그들을 받아줬을 때. 너무나 기쁘고 감사했다고, 지은 씨는 울며 말했다.

서로를 다독이며 지켜낸 사랑은 부부를 강하게 이어주었다. 10년 전, 친정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둘째를 임신한 채 만삭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식전 물 한 잔, 매일 아침

아침 7시, 아랑이와 예랑이는 일찍 일어나는 편이다. 엄마가 매일 식전 물 한 잔을 준비해 준다.

13살 아랑이가 머리카락을 야무지게 묶었다. 아침 식탁엔 늘 책이 있다. 영어로 된 성경책을 읽으며 차분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예랑이 머리는 엄마가 손질해 준다. 막내 이든이를 깨우는 건 또 다른 일이다. 큰 왕자님, 둘째 왕자님, 일어나세요. 쏟아지는 잠에 눈꺼풀이 제일 무겁다.

여섯 살 이든이는 아빠에겐 영어로, 엄마에겐 한국말로 대화한다. 아이들의 영어 실력은 날로 느는데, 아빠의 한국어 실력은 늘 기미가 없다.

* * *

대장금을 좋아하던 청년

가브리엘 씨는 부산 영도의 대학에서 7년째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졸업식 날, 박사 가운을 입지 못했지만 학생들과 인사를 나눴다.

"매번 만날 때마다 반갑게 인사해 주시고, 존경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대학교수와 고등학교 교사였던 부모님 아래서 자란 가브리엘 씨. 어릴 때부터 좋은 학교를 다녔고, 꿈은 남아공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대학 때였다고 했다. 혼자 한국어를 배우다가, 드라마 대장금을 처음 봤다. 너무 좋다고 생각했다. 대장금을 좋아하던 남아공 청년은, 부산 아가씨를 만나 인생이 달라졌다.

김천에서 온 손님

김천에 사는 장모님 정희 씨가 자주 부산에 온다. 선물을 한가득 안고 왔다.

"피곤해 보이는데?"
"아니에요."

평소 가브리엘 씨가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데, 장모님이 계실 때는 직접 설거지를 하려고 한다. 지은 씨가 몰래 남편에게 말한다. 빨리 해, 엄마 몰래.

2년 전부터 지은 씨는 살림에 보태려고 영어 과외를 시작했다. 맞벌이를 하다 보니 일이 끝이 없다. 오랫동안 요양보호사로 일해온 정희 씨는, 양쪽 어깨를 모두 수술받았다. 처음 일을 쉬면서도, 딸네 집에서 일거리를 찾아낸다.

장모님이 끓인 진국 같은 국. 24시간을 끓였다고 했다. 남아공 사위는 장모님 음식이라면 다 잘 먹는다.

"고기 티끼. 마스터셰프예요."
* * *

아나운서가 되고 싶은 아이들

영어 라디오를 즐겨 듣는 자매가 오늘 아나운서 1차 시험을 앞두고 있다. 최종 합격하면 한 달 동안 어린이 뉴스를 진행하게 된다.

"이게 되면 뭐가 좋을 거 같아?"
"제 꿈도 이룰 확률이 높아지고, 미래 일할 장소에 적응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첫째 아랑이의 꿈은 라디오 MC. 둘째 예랑이는 방송국 MC와 스튜어디스. 전화로 시험을 봤다. 아랑이가 먼저 받았다.

My name is... 두근두근. 예랑이가 더 긴장했다. 짧은 자기소개와 인터뷰가 끝났다. 다음 날 11시에 합격 여부를 메일로 보낸다고 했다.

다음 날, 메일이 왔다.

"축하합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럴 리가 없는데."
"아니야, 이럴 리가 있지. 너 열심히 했잖아."

영어 라디오 아나운서 1차 시험. 첫 번째 관문은 무사 통과. 해피 댄스가 이어졌다.

"기분이 어때?"
"행복해요."

인생 첫 마스크팩

1차 합격 축하 자리에 큰엄마네 횟집을 찾았다. 코로나19로 시장에 손님 발길이 뚝 끊겼다고, 30년 장사한 큰엄마가 말했다.

가브리엘 씨가 한국에 와서 처음 회를 먹어본 게 큰엄마네였다고 했다. 처음엔 낯설었지만, 지금은 너무 좋아한다고.

"가서방, 어떻게 좋아요? 외국 사람 같지 않고, 정도 많고 똑똑하고."

그날 밤, 장모님이 가져온 마스크팩을 가브리엘 씨가 처음으로 해봤다. 40년 인생 처음이었다.

아빠 얼굴이 휘어져서 어색했다. 아이들이 웃었다. 진짜 괴물 같다고 했다. 인생 첫 마스크팩을 하고 울고 웃은 밤이,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다.
* * *

샘프, 그리고 유학생들에게 가는 길

며칠 전, 남아공에서 온 콩과 옥수수가 잔뜩 도착했다. 지은 씨가 전날부터 불려둔 재료를 4시간째 끓이고 있었다. 샘프. 남아공에 살며 시어머니께 배운 음식이다.

남아공에 갈 때마다 재료를 챙겨와, 고향이 그리울 때면 해먹는 음식이라고 했다. 매콤한 닭볶음탕과 함께 먹으면 좋은 조합이라고. 큰 통에 나눠 담은 음식을 들고 아빠와 딸들이 어딘가로 향했다.

가브리엘 씨가 근무하는 대학의 유학생 기숙사였다. 코로나19로 외출을 자제하던 제자들에게 음식을 전했다.

"치킨이랑 아프리카 음식 좀 만들었어요. 입맛에 맞으면 좋겠어요."

이곳 생활은 고향과 너무 다르다고, 한 학생이 말했다. 가브리엘 씨가 가구 옮기는 것 같은 작은 일까지 도와준다고 했다.

"한국어가 너무 어려워요. 음식도 너무 달라요. 그래서, 내가 도울 수 있으면 돕고 싶어요."

척하면 척, 장모님과 사위

저녁 식사 자리. 가족이 손을 모았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맛있는 음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코로나에 감염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아멘."

식사 후엔 남아공의 부모님과 영상통화를 했다. 13,000킬로미터 떨어진 곳, 계절도 정반대라 지금 그곳은 여름이었다.

화면 너머로 인사가 오갔다. 사랑해요. 보고 싶어요. 1년이 넘도록 직접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장모님이 눈물이 날 것 같다고 했다. 보고 싶어서.
남아공 부모님은 늘 아들의 선택을 지지해 주셨다. 작년엔 처가 어른들을 모시고 남아공에 다녀왔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가족은 가족이었다.
* * *

마지막 녹음, 그리고 돈가스

드디어 라디오 아나운서 최종 합격자가 발표됐다. 아랑이 혼자 최종 합격했다. 첫 녹음 날, 차 안에서 연습을 많이 했다고 했다.

BFM Sunday's Kids News. 배경음악이 올라갔다 내려가면 시작하는 거예요. 코로나19 관련 뉴스였다. 마스크 수출 규제에 관한 내용이었다. 녹음실 밖은 거의 팬클럽 수준이었다.
"좀 긴장되고 어려웠어. 연습할 때는 이런 시스템이 없으니까 편했는데, 더 부담됐어요."

한 달 동안 다섯 번의 방송이 남았다. 경험이 가장 큰 공부라는 걸 알게 해주고 싶은 게,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일 것이다.

그날 저녁, 지은 씨가 솜씨를 발휘했다. 수제 돈가스. 이든이가 빵가루 만들기를 도왔다.

"완전 짱이에요. 천국에 있는 거 같아요."
"자주 해줄게. 엄마가 많이 부족했네."

싹 비운 접시. 돈가스 대성공이었다.

아리랑을 부르는 남아공 아빠

아랑이와 예랑이는 몇 년 전부터 국악을 배우고 있다. 엄마가 영어를, 선생님이 국악을 가르치는 이중 교육이다.

아리 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가브리엘 씨도 따라 불렀다. 장단이 흥겨운 몸짓을 만들어냈다. 아프리카 축제에 나갔을 때, 아이들이 한국 민요를 불렀고, 장단을 못 치는 엄마 대신 아빠가 쳤다고 했다.

볼수록 재능이 많은 아이들이었다.

* * *

같은 남아공 고향, 부산에서 만난 친구

영도에서 차로 40분, 친구네를 찾았다. 장모님도 함께였다. 교회 친구이자 남아공 친구. 남편들끼리도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라 금방 통했다.

아내들은 둘 다 부산 여자. 남편들은 둘 다 남아공 출신. 우리 삶이 강하게 겹쳐 있어서, 다른 남아공 사람들보다 더 쉽게 연결된다고 가브리엘 씨가 말했다.

저녁은 남아공 가정식. 양고기와 그레이비 소스, 매시드 포테이토. 정다운 친구, 그리운 고향 음식. 행복한 저녁이었다.

책상 위의 보이지 않는 선

자매는 지금까지 책상 하나를 나눠 쓰고 있다.

"여기 선이 있어요. 안 보이지만. 쓰레기 하나가 여기 걸치면 바로 찍어요."

이해랑인 수학을 잘하고, 아랑이는 수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수학 모르는 거 있으면 어떡해?"
"동생한테 물어봐야지. 거의 모르는 게 없어요."

솔직하고 똑부러지는 아이들에겐 원대한 꿈이 있다. 벽에 붙은 세계지도를 가리키며, 남아공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짚었다.

"비행기 타면 거의 20시간. 한국에서 카타르까지 11시간, 카타르에서 남아공까지 9시간."

할머니, 할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 그리고 추울 때, 답답한 도시가 싫을 때. 아이들은 그럴 때 남아공에 가고 싶다고 했다.

* * *

쿠폰으로 시작된 연애

오랜만에 둘만의 데이트. 흰여울 문화마을 거리도 지금은 조용했다.

"주로 어디서 연애했어요?"
"길거리 돌아다니면서, 쿠폰 찾아서."

조금이라도 아껴 쓰려고 할인되는 곳을 찾아다녔다고 했다. 남편에게는 그게 무척 특이하고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기억하죠, 진짜."

남아공에서 신학 교수를 꿈꾸던 청년은, 한국을 선택했다. 어떤 인연으로 그 먼 거리를 날아와 만나게 된 걸까. 가보지 않은 인생길은 때로 두려웠지만, 함께 헤쳐 나왔다.

결혼 13년, 후회 없는 오늘을 산다.
* * *

붕어빵 부자

일요일, 기다리던 방송이 나왔다. 아랑이의 첫 뉴스. 가브리엘 씨가 더 신이 났다.

"제 딸이 좀 자랑스럽고, 시작이 반인데 이렇게 도전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기특해요."

봄이 성큼 다가왔다. 가족이 찾은 곳은 텅 빈 대학 운동장. 엄마가 골키퍼를 맡았지만, 삼남매의 협공으로 골문이 열렸다.

왜 어떤 가족은 텔레비전 없이도 충분할까요.
라디오와 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하루가 채워졌습니다.
13년 전 헤어졌던 인연이 다시 이어진 건 우연일까요.
쿠폰을 찾아다니던 두 사람의 걸음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만남은 그렇게 오래갑니다.
아이들의 꿈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걸까요.
매일 듣던 라디오 한 토막이, 어느 날 마이크 앞에 서게 만들었습니다. 작은 습관이 큰 길이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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