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연극배우의 꿈을 키우던 지현 씨. 아빠가 뇌경색으로 쓰러졌단 연락에 곧바로 곰소항으로 내려와 어부가 되었다
방송일: 2026. 6. 13. | KBS 인간극장


이 글에서 보게 될 장면들
- 새벽 어두운 선착장, 아버지 얼굴에 선크림을 발라주는 딸의 손
- 가파른 선착장 계단, 아버지가 내려올 때 아래에 서 있는 사람
- 4년 전 병원 복도, 스물여섯 살이 서울 짐을 싸던 날
- 아버지가 새벽에 물을 마시지 않았던 이유
- 문 닫은 식당에 혼자 불을 켜고 마이크를 잡는 밤
새벽 네 시, 아직 어두운 선착장
초여름 더위가 시작될 무렵의 곰소항은 이른 새벽부터 냄새가 먼저 왔다. 전라북도 부안군 곰소. 질 좋은 천일염과 젓갈로 이름난 항구다. 좁게 줄지어 묶인 어선들 위로 갈매기 소리가 낮게 흘렀다.
불빛 하나가 켜지는 집이 있었다.
"아빠, 발랐어?"
"아빠 발랐어."
"발라. 다시."
남자는 멈칫했다. 딸은 이미 얼굴에 크림을 바르고 있었다. 이마, 볼, 목. 그리고 귀.
"귀도 발라."
"이미 다 타버렸어."
남자가 말했다. 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남자의 귀 뒤까지 바르고 나서야 손을 내렸다.
문성훈 씨와 딸 문지현 씨. 두 사람은 매일 아침 이 시간을 함께 지냈다. 아버지는 수십 년을 바다에서 보낸 어부였다. 딸은 3년 전까지 서울에서 연극 배우였다.
배가 저렇게 출렁거리는데
선착장에 나오자 바람이 많이 불었다. 어선 하나가 줄에 묶인 채 출렁이고 있었다.
"바람이 너무 많이 부는 거 아니야?"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고 배에 올랐다. 수십 년 바다일을 해온 사람에게 이 정도 바람은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딸의 눈은 아버지의 오른편 몸을 따라가고 있었다.
4년 전, 문성훈 씨는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오른쪽이 마비됐다. 처음엔 쓰지 못했다. 지금은 걷고 운전도 하지만, 오른손에 힘을 주는 것은 여전히 불편했다. 바다 위에서 흔들리는 배는 성한 사람에게도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
곰소항에서 또래 나이로 배를 타는 경우는 없었다. 선착장을 오가는 것은 대개 아버지보다 나이 많은 어부들이었다.
"저 없으면 아빠가 혼자 하거든요. 둘이도 이렇게 힘든데. 그래서 제가 힘든 것보다 위험하니까 따라 나오죠."
말은 단순했다. 그 단순함 안에 3년이 들어 있었다.
통발 70개를 걷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바람이 세면 줄이 끌렸다. 요령이 더 필요한 일이었다. 딸이 혼자 해내려 했지만 역부족인 날이 많았다.
바다 청소나 다름없는 날들도 있었다. 통발 70개에서 나오는 돌개가 겨우 한 움큼인 날, 아버지는 중얼거렸다.
"인건비는커녕 기름값이나 나오겠나."
딸은 듣고도 못 들은 척했다.
어느 날, 아버지의 발이 미끄러졌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팔꿈치에 상처가 났다.
"쓰라리지?"
딸이 먼저 물었다. 아버지는 고개를 젓고 싶었지만, 딸이 이미 방수 밴드를 들고 있었다.
"성한 데가 없어. 계속 나네."
딸이 말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딸이 팔꿈치를 잡고 밴드를 붙였다.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지현 씨는 그날 하루 만에 서울 짐을 다 싸서 택배로 붙였다. 스케줄을 모두 바꿨다. 몸만 내려왔다. 병원으로.
그때 지현 씨는 스물여섯이었다. 연극 배우로 막 자리를 잡아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더 중요한 이유가 없었다.
"감병인 쓰기도 싫었고. 사실 내 아빠인데, 내가 해야지. 남의 아빠도 아니고 내 아빠잖아요."
병원에서 1년을 함께 있었다. 어머니는 식당을 지켜야 했다. 남동생은 군인이었다. 막내 여동생은 아직 어렸다.
처음엔 아무것도 몰랐다. 병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간병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도. 화장실을 부축해서 모셔야 했다. 앉으면 쓰러지고, 다시 앉으면 또 쓰러지고. 그러기를 반복했다.
"새마을 죽고 싶은 저기가, 그런 생각을 한두 번 해먹었어. 그때만도 스물여섯이었는데. 한참 돌아다녀야 하고 친구도 만나야 하는데. 나 때문에 어디 움직여도 못 오고. 그래도 딸이 옆에서 그렇게 하는 거 보면, 또 그런 생각을 가졌다가도 안 되겠구나. 어떻게 되는지 빨리 일어나서 아빠를 해야지. 그래서 나는 우리 딸이 나를 살렸다고 봐요."
그런데 딸이 기억하는 장면은 따로 있었다.
어느 새벽, 아버지가 혼자 일어나려는 소리가 났다. 딸이 눈을 떴다.
"물을 안 드셨어요?"
"화장실 갈 때 내가 깨니까."
딸을 깨울까 봐. 아버지는 밤새 물을 마시지 않았던 것이다.
그 말이 오래 남았다고 딸이 말했다.
재활은 길었다. 아버지는 열심히 했다. 옆에서 보는 딸이 그 노력을 증언했다.
"아빠 같이 아픈 분들이 안 좋게는 팔이 완전히 이렇게 안으로 굽어버리는 경우도 있고. 아빠는 잘 돌아다니고 운전도 하고. 못 하시는 분들도 많아요. 아빠 노력하는 거 많이 봤어요. 옆에서."
어머니는 그 사이 우울증이 왔었다고 했다. 계속된 실패와 남편의 병이 겹쳤다. 앰뷸런스를 두 번 탔다. 밥도 못 먹고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때 아버지가 밥을 챙겨다 주었다고 했다. 그러다 아버지마저 쓰러지자, 어머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이 가족은 그렇게 서로를 번갈아 가며 일으켰다.
문 닫은 식당에 불이 켜진다
손님이 다 빠져나간 저녁, 식당 안에 불이 켜졌다. 의자들이 벽 쪽으로 밀렸다. 마이크 하나가 세워졌다.
지현 씨는 대학에서 실용음악을 전공했다. 졸업 후에는 연극 배우의 길을 걸었다. 가수는 한 번도 진지하게 꿈꿔본 적 없던 방향이었다.
고향에 내려온 뒤, 마땅한 연습 공간이 없었다. 아버지가 노래방 기계를 들였다. 영업이 끝나면 식당이 연습실이 됐다.
작년 한 해 동안 전국노래자랑 연말 결선 우수상, 섬진강 다슬기 축제 최우상, 울산 선모수 가요제 인기상, 격포 가요제 최우상을 받았다. 올해 초에는 작곡가에게 곡을 받아 자기 이름이 박힌 앨범도 냈다.
"아빠는 노래할 때 관객이 없으면 불안해."
딸이 말했다.
"무대에서는 내가 짱이라고 생각하고 해. 걱정하지 마."
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고 했다. 안쓰러워서, 라고 했다. 딸은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말했다.
"아빠가 다 혼자 뭐든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안 간다는데. 빨리 성공해서 아빠 이런 거 안 해도 되게 해줘. 그게 아빠 소원이야."
갑시다. 출발해.
만선을 꿈꾸며 바다로 나가는 아침이면 두 사람은 사이좋게 선착장에 섰다.
"아빠, 나랑 같이 배 나가니까 좋지?"
"좋아. 좋아."
딸이 뭔가 더 물으려다 그냥 선착장을 걸었다. 아버지가 먼저 배에 올랐다.
언제부터인가 두 사람이 배 위에서 주고받는 말들은 줄어들었다. 줄을 잡는 방향, 배가 멈추는 타이밍, 크레인 하강 버튼을 누르는 순간. 말이 없어도 알았다.
딸은 말했다.
"아빠 때문에 아무나 못 하는 경험을 하는 거잖아요. 재밌어요. 그래도 이렇게 사는 것도 재밌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이렇게 하잖아요. 노래도 하고. 그러니까 감사하고 살아요, 그냥."
오후 햇살이 바다 위에 납작하게 누워 있었다. 통발에서 꺼낸 돌개 몇 마리가 물통 안에서 움직였다.
딸은 그것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잠시 후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가 배 뒤편에서 줄을 정리하고 있었다. 오른손이 불편해도, 오른손으로 했다.
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파도가 낮게 왔다가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