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에서 내려온 큰딸, 비어 있지 않은 방
- 어젯밤 직접 잡아온 갑오징어와 한치가 오른 밥상
- 말보다 밥으로 인사하는 남매 사이
- 모텔 청소를 도우며 소매를 걷어붙이는 딸의 손
- 볼링장에서 터진 웃음, 그리고 저녁의 떡볶이
방이 먼저 말을 걸었다
울진 바닷가 마을, 아침 해가 미처 다 오르기 전부터 광현 씨의 하루는 시작된다. 새벽 물속에서 미역을 따고, 돌아와 모텔 청소를 돕고, 가게를 열고. 하루하루가 물결처럼 반복되는 그 집에, 오늘은 손님이 왔다.
서울에서 내려온 지은 씨가 짐을 풀기도 전에 방으로 먼저 올라갔다. 작은 방이었다. 책상 위에 동생 지우의 교과서가 쌓여 있었고, 벽에는 아직 떼지 않은 작년 달력이 붙어 있었다. 방학 때마다 올 때 쓰는 방이라고 했다. 따로 말하지 않아도 자리가 있었다.
어젯밤 바다가 차려 준 밥상
광현 씨가 전날 밤 직접 잡아온 갑오징어와 한치가 도마 위에 올랐다. 칼을 잡은 건 지은 씨였다.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군 복무 시절 취사병을 했다고 했다. 아버지가 있으면 굳이 주방에 안 들어가는데, 오늘은 자기가 하는 게 빠르다며 앞치마를 둘렀다.
살가운 인사 대신 맛있는 음식이 먼저 놓였다. "밥 먹읍시다. 핸드폰 좀 내려놓으시고." 아무도 어색해하지 않았다.
광현 씨가 술잔을 들었다. 지은 씨가 잔을 받았다. "오빠가 잡아온 거야." "고맙다." 짧은 말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것으로 충분해 보였다.
엄마의 자리에 이미 다른 온기가 있었다
지은 씨가 처음 광현 씨를 만난 건 여섯 살 때였다. 엄마가 재혼을 했고, 새 아버지는 이혼을 했고, 새 아이가 있다는 것. 그것이 중요치 않았던 사람이 광현 씨였다고 지은 씨는 말했다.
방학 때마다 내려오면 계곡에 갔고, 놀이동산에 갔다. 케이블카를 타러 가고, 후포 스카이워크도 갔다. 거창한 계획이 아니었다. 그냥 어딘가에 같이 갔다. 그 기억들이 쌓였다.
왜 어떤 사람은 오래 기억에 남는 걸까요. 아마도 특별한 말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 사람이 늘 거기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텔 청소, 소매를 걷어붙이고
광현 씨가 바다에 나간 시간, 지은 씨는 모텔 청소를 혼자 시작했다. 침대 커버를 씌우는 손이 빠르고 야무졌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거의 3년째 오고 있습니다. 어차피 도와드리러 온 거라서, 빨리 끝내고 같이 쉬면 좋잖아요."
화장실 청소가 끝났냐고 물었을 때, 지은 씨가 "어, 끝났어. 닫으면 돼" 하고 대답했다. 오래된 집에서 나누는 말 같았다.
볼링공이 구르는 동안
오후에 광현 씨가 가게 문을 걸어 잠갔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아이들을 다 데리고 나섰다. 목적지는 볼링장이었다.
팀을 나눴다. 광현 씨와 지아. 지은 씨와 윤, 지우. 밥값 내기라고 했는데, 지은 씨는 이겨도 어차피 자기가 낼 것 같다고 했다.
"일하는 거보다 재밌죠." 광현 씨가 말했다. 어마무시하다고 했다. 거창한 행복을 찾으려 애쓸 필요는 없었다. 볼링 레인 위에, 이미 있었다.
떡볶이가 식기 전에
집으로 돌아온 저녁, 지은 씨가 냄비를 올렸다. 서른파를 넣으면 더 맛있다고 했다. 동생들이 부엌 문가에 서서 냄비 안을 들여다봤다.
서울에서도 전화를 거의 매일 한다고 했다. 지우와 지하가 사 달라는 것들을 택배로 보내기도 한다고. 오늘 내기의 턱은 떡볶이로 대신하기로 했다.
지아가 매굽다고 했다. "맵지 않아" 하고 지은 씨가 말했다. 지아가 그래도 머리끈 달라고 했다. 지은 씨가 건네줬다. 동생들이 언니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언니 말이면 고분고분 따랐다.
뽀뽀, 그리고 버스 미션
사진을 꺼냈다. 지아와 지하가 공주 옷을 입고 있는 오래된 사진. 2019년이라고 했다. 다섯 살 때였다.
지은 씨가 핸드폰에 동생들 사진밖에 없다고 했다. 엄마 핸드폰처럼이라고 했다.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지하가 언니한테 뽀뽀를 했다. 강제라고 했다. 안 하면 다리를 제압한다고 했다. 지은 씨가 뽀뽀를 받았다. 매번 받아 주는 걸 아이들이 알고 있었다.
그날 밤, 가게 불이 꺼진 시간에 낯익은 얼굴들이 찾아왔다. 떠들썩한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왔다. 광현 씨가 문을 열었다. 우편함 안의 딱새 새끼들은 그 사이 조금 더 자라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