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로드일: 2026. 6. 9.


- 마당 텃밭에서 바로 뜯어 올린 상추가 오른 점심 밥상
- 밥이 없어 손님을 기다리게 한, 9개월 만에 처음 있는 일
- 18킬로미터를 달려간 미용실, 처음으로 헤어스타일을 주문한 지우
- 아이들이 잠든 뒤 꺼낸 아내의 유품과 연습장 편지들
- 취업 준비 중에 짬을 내어 내려온 딸, 비밀의 방
밥이 없어서, 3분이 길었다
점심 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광현 씨는 마당 텃밭에서 상추를 뜯고 있었다. 심은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잘 자라는 건지도 몰랐는데, 비가 한 번 오고 햇빛이 세지더니 갑자기 훌쩍 자랐다고 했다. 손님상에 올리기 직전에 뜯어오는 상추였다.
그날따라 단골들이 일찍 왔다. 밥이 아직 되지 않았다. 반찬도 다 나오지 않았다. 3분. 찬이 아무리 많아도 밥이 없으면 내갈 수가 없었다.
밥장사를 시작한 지 9개월.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고 했다. 가게가 만석이 된 것도 드문 일이었다. 밀처럼 들이닥쳤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18킬로미터, 처음으로 원하는 머리가 생긴 날
오후에 광현 씨는 학교로 마중을 나갔다. 오늘은 미용실 가는 날이었다. 지우와 지아가 차에 올랐다. 미용실까지는 18킬로미터. 서울에선 집 앞에만 나가도 수두룩하던 곳이었다.
지우가 의자에 앉았다. 미용사가 어떻게 잘라줄까 물었다. 지우가 대답했다. 이렇게, 저렇게. 구체적으로.
뒤에서 지켜보던 광현 씨와 언니가 더 신이 났다.
아내를 보내고 이듬해에 울진으로 내려왔을 때, 지우는 아홉 살이었고 지아는 여섯 살이었다. 걸어다니면 양팔에 매달려서 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언제 이렇게 컸는지, 광현 씨도 신기하다고 했다. 그 모습을 아내와 함께 보지 못한다는 게, 아쉽고 아프다고 했다.
오빠가 친구가 없어서
잠시 외출했다 돌아온 윤역 씨가 과자를 한 봉지 사 들고 왔다. 동생들 생각이 났다고 했다. 동생들은 반응이 시큰둥했다. 게임 중이었다.
그러다 같이 게임을 했다. 규칙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싸웠다. 나이 차이로 따지면 오빠보다 삼촌에 가까운 윤역 씨가 눈높이를 맞춰 놀아줬다.
서른 살이라고 하자 동생들이 놀렸다. 할아버지라고 했다. 4학년 담임 선생님이랑 나이가 비슷하다고 했다. 윤역 씨가 웃었다. 광현 씨가 윤역 씨에게 그랬던 것처럼, 윤역 씨도 동생들에게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어주고 싶은 것이었다.
학교 가는 길, 엄마가 있는 곳
며칠 후 광현 씨가 아이들을 데리고 집 근처 작은 절을 찾았다. 특별한 날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가끔 학교 끝나고 엄마한테 가고 싶다고 하면, 그냥 바로 왔다고 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목이었다.
울진으로 내려올 때 함께 옮겨왔다고 했다. 가까이에 있어야 아이들이 보고 싶을 때 바로 올 수 있으니까. 너무 어릴 때 엄마를 잃어 기억이 많지 않을 터. 그래도 그리움이 덜하진 않을 것이다.
아이들이 잠든 뒤, 꺼낸 것들
아이들을 재우고 거실로 나온 광현 씨가 작은 봉투를 꺼냈다. 아내의 유품을 압축해서 모아놓은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에 잘 입던 옷이 들어 있었다. 아이들이 갑자기 엄마 보고 싶다고 할 때 엄마 냄새가 나는 것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넣어뒀다고 했다. 아내가 마지막에 갖고 있던 액세서리들. 지우와 지아가 성인이 되면 주려고 가지고 있다고 했다.
연습장을 꺼냈다. 처음 연애할 때 저녁에 편지를 써서 놓고 가면, 아침에 아내가 답장을 써서 다시 갖다 놓았다고 했다. 연습장 한 권이 그렇게 채워졌다.
아이들이 나중에 이걸 보면, 엄마랑 아빠가 진짜 싸우지도 않고 잘 살았나 보다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럴 거라고 자신이 돼서 남겨두고 있다고 했다.
허락된 시간이 길지 않아서, 그토록 뜨겁게 살았던 걸까요. 아니면 그토록 뜨거워서, 시간이 짧아도 충분했던 걸까요.
비밀의 방
주말 오후, 광현 씨가 서둘러 차에 올랐다. 지우와 지아도 신이 나서 따라 탔다.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것이었다. 15분 후에 도착한다고 했다.
차가 서자 광현 씨 표정에 반가움이 가득했다.
윤역 씨의 동생, 지윤 씨였다. 취업을 준비하는 중에 며칠 짬이 생겨 내려왔다고 했다. 방학 때마다 알바 대신 울진으로 오라고 불렀는데, 이제 취업 준비 중이라 건드릴 수가 없다고 했다. 짬이 날 때마다 찾아오는 곳이라고 했다.
그런데 동생들이 있는 집을 지나쳐 계단을 올랐다. 객실로 올라가는 계단이었다. 문이 열렸다. 비밀의 방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