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한반도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꾼 그날이 밝았습니다. 북한군의 선전포고 없는 기습 남침. 불과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국군과 유엔군은 패퇴를 거듭하며 마지막 보루인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났습니다.
😥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죠. 모두가 패배의 그림자를 떠올리던 그때, 단 한 번의 도박과도 같은 작전이 기획됩니다. 6.25 전쟁의 전세를 단숨에 뒤집어버린 '그날', 꼬꼬무 197회가 조명한 기적의 작전, '크로마이트(Chromite)' 이야기입니다. 😲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프로그램명: 197회, 크로마이트 작전
주요 내용: 인천상륙작전, 맥아더 장군, 6.25 전쟁
- 6.25 전쟁 발발 3일 만의 서울 함락, 낙동강 전선까지 밀린 절체절명의 위기.
- 성공 확률 5000분의 1, 모두의 반대를 무릅쓴 맥아더 장군의 '크로마이트 작전'.
- 카투사 1기, 비밀 첩보 요원, 그리고 팔미도 등대의 불빛까지, 작전을 성공시킨 숨은 영웅들.
1129일의 기록, 70개국이 뛰어든 비극의 서막
'625 전쟁 1129일'. 이 책은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순간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까지, 단 하루도 빠짐없이 그날의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6월 25일 일요일, 날씨는 '아주 맑음'. 그 평화로운 날씨와는 정반대로, 새벽 4시 북한군의 전면 남침이 시작되었죠. 이 책을 엮으신 분의 인터뷰가 참 인상 깊었습니다. 우리 세대가 겪은 이 비참한 전쟁의 실상을 다음 세대에게 알려,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하셨다고 해요.
꼬꼬무의 이야기처럼, 이 전쟁은 단순한 남북 간의 다툼이 아니었습니다. 전투 지원 16개국, 의료 지원 6개국, 물자 지원 38개국까지... 무려 60개국이 넘는 유엔군이 참전했죠. 반대 진영까지 합치면 당시 전 세계 93개국 중 무려 70개국이 이 작은 한반도의 전쟁에 휘말린 거예요. 유엔 조직 이래 최대 규모의 무력 행사이자, 사실상의 '세계 대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전 세계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전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3일 만에 서울 함락, 계속되는 후퇴. 정부는 대전, 대구, 그리고 마지막 부산까지 밀려났습니다. 이제 남은 건 낙동강 방어선뿐. 이곳이 뚫리면 대한민국은 그대로 지도에서 사라질 위기였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역사의 무대로 오른 이들
모두가 낙동강 전선만 바라보던 8월 16일, 대구에 살던 19살 영봉 님은 학교 가던 길에 갑자기 트럭에 태워집니다. 영문도 모른 채 도착한 곳은 바다 앞. 그리고는 배에 올라타 일본으로 향하죠. "당신들은 앞으로 유행군이 되어 모든 활동을 같이 한다." 이것이 바로 '카투사(KATUSA)' 1기의 시작이었습니다. 미 육군 7보병사단 17연대 의무부대, 전투 위생병. 그렇게 313명의 청년들은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들어섭니다.
😥 솔직히 이 19살 영봉 님의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학교 가던 길에 영문도 모른 채 트럭에 올라타 유행군이 되다니요. '카투사 1기'라는 이름 뒤에는 이렇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선으로 향해야 했던 청년들의 갑작스러운 희생과 헌신이 숨어있었네요.
같은 날, 영봉 님과는 반대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배가 있었습니다. 26살 연정 님. 그는 대한민국 해군 사령관이었지만 1년 전 이승만 대통령의 비밀 지시로 일본 GHQ(연합군 최고 사령부)의 비밀 요원이 되었습니다. 그의 사령관은 바로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었죠. 그리고 8월 16일 밤, 연정 님은 맥아더의 극비 임무를 품고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성공 확률 5000분의 1" 모두가 반대한 인천으로의 길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기 직전, 맥아더 장군은 모두가 상상하지 못한 묘안을 내놓습니다. "적의 허리를 끊어 버리자." 길게 늘어진 북한군의 보급로를 중간에서 차단하고, 앞뒤로 포위해 괴멸시키겠다는 전략이었습니다. 그가 지목한 곳은 바로 '인천'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미 해군 참모총장을 비롯한 모두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인천은 상륙 작전의 최악의 장소였기 때문이죠.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9m의 조수간만의 차. 물이 빠지면 거대한 갯벌이 드러나 배가 접근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상륙이 가능한 만조 시간은 극히 제한적이었죠.
[팩트 체크]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확률은 5000분의 1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미 해군 수뇌부는 극심한 조수간만의 차, 좁고 구불구불한 수로, 높은 방파제를 이유로 "불가능하다"고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적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에 기습이 가능하다"며 작전을 밀어붙였습니다.
모두의 반대에도 맥아더는 인천을 고집했습니다. 적의 허리를 끊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지점은 수도 '서울'과 가장 가까운 '인천' 뿐이었으니까요. "나는 인천에 상륙할 것이다, 아니면 죽음뿐이다." 그의 강력한 의지에 결국 9월 8일, 작전명 '크로마이트'가 승인됩니다. 디데이는 9월 15일.
😲 정말 대단한 배짱 아닌가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할 때, 그 '불가능성' 자체를 기만전술로 활용하겠다는 맥아더의 역발상이 놀라웠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이 작전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용납되지 않는, 대한민국의 운명을 건 위험천만한 도박이었죠.
D-Day: 어둠을 밝힌 팔미도 등대의 불빛
작전 개시 하루 전인 9월 14일 새벽. 비밀 요원 연정 님은 인천 앞바다의 무인도 '팔미도'에 도착합니다. 그의 임무는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인 팔미도 등대를 장악하는 것이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261척의 함대가 안전하게 수로를 통과하려면 이 등대의 불빛이 반드시 필요했죠.
9월 15일 새벽, 마침내 연정 님이 지키는 등대에서 환한 불빛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그 불빛을 신호로 무수한 상륙정들이 월미도 해안으로 돌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선발대는 썰물이 되기 전, 단 한 시간 만에 북한군을 격퇴하고 월미도를 점령합니다.
하지만 진짜 위기는 그다음이었습니다. 다음 밀물까지 약 12시간 동안, 그들은 고립된 채로 버텨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성공을 거뒀고, 오후 5시 30분, 주력 부대가 물밀듯이 인천항으로 밀려 들어왔습니다. 😭
전쟁 발발 이후, 유엔군이 수세에서 공세로 바뀐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3개월 만의 감격, 서울을 되찾다
인천상륙작전은 대성공이었습니다. 3일째인 9월 17일, 인천은 완전히 수복되었습니다. 다음 목표는 당연히 수도 서울이었습니다. 하지만 북한군도 필사적이었습니다. 지금의 안양천을 방어선 삼아 영등포에서 격렬하게 저항했죠. 치열한 시가전 끝에 안양천을 건너고 영등포에 진입합니다.
하지만 서울 중심부로 가는 길은 또 다른 장벽에 막혔습니다. 와우산, 연희고지, 안산을 잇는 북한군의 방어선. 고지를 점령한 적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싸워야 하는 최악의 지형이었습니다. 유엔군과 국군의 선택은 정공법. 수류탄으로 시야를 가리고 전방으로 돌격하는, 어쩌면 무모해 보이는 작전이었습니다.
그만큼 서울 탈환이 간절했던 거죠.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공군과 야포 부대의 지원에 힘입어 마침내 고지를 점령합니다.
그리고 9월 28일, 마침내 서울을 완전히 수복합니다. 9월 29일 중앙청 앞 환도식. "태극기 흔들며 반가워하고..." 시민들의 환호 속에서 서울은 3개월 만에 다시 대한민국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 정말 눈물이 핑 도는 장면이었습니다. 3일 만에 빼앗긴 수도를 3개월 만에 되찾기까지, 그 과정에서 스러져간 18만여 명의 국군과 유엔군 장병들, 그리고 카투사 1기 영봉 님, 비밀 요원 연정 님처럼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영웅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
물론 이 작전 이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쟁은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크로마이트 작전'의 성공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맑은 날'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75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