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다큐멘터리 3일 20260629방송 가는 날이 장날 - [하이라이트 2부]

가는 날이 장날 - 경남 함양 이동 장터 72시간 |

방송일: 2026.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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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깊을수록 대문 여는 소리가 늦게 들립니다. 일주일에 한 번, 종소리와 함께 트럭 한 대가 지리산 자락 마을을 돕니다. 그 트럭이 지나간 뒤에 남는 것은 라면 몇 봉지가 아니라, 잠깐의 안부였습니다.
  • 다리가 불편해 마당까지도 못 나오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 아내가 요양병원에 들어간 뒤, 된장찌개 냄새를 그리워하는 남자가 있습니다
  • 홍어 한 마리를 기다리며 일주일을 보내는 어르신이 있습니다
  • 지리산 밭이랑에 발자국 소리를 매일 남기는 할머니가 있습니다
  • 그 모든 집을 도는 트럭 한 대가 있습니다

새벽안개가 걷히기 전, 종소리가 먼저 도착합니다

산길은 아직 축축했습니다. 밤새 내린 이슬이 풀잎 끝에 매달려 있었고, 멀리서 트럭 엔진 소리가 낮게 울려왔습니다. 마을 어귀 평상에는 벌써 몇 사람이 나와 앉아 있었습니다. 누구도 시계를 보지 않았지만, 트럭이 오는 시간은 다들 알고 있었습니다.

경적 소리가 두 번 울리자 대문이 하나둘 열렸습니다. 지팡이를 짚은 걸음, 허리를 굽힌 걸음, 그리고 마당까지 나오지 못해 손짓만 하는 걸음들이 트럭 쪽으로 모였습니다.

이 산골마을에서 트럭 소리는 단순한 경적이 아닙니다. 누군가 나를 보러 왔다는 신호입니다.

왜 이 트럭은 매주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이 길을 오르는 것일까요.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이 길 끝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방법이 별로 없었습니다.

* * *

라면 열 개를 사는 이유

트럭 앞에 선 노인은 라면 봉지를 하나씩 세고 있었습니다. 열 개를 채우고도 손을 떼지 못했습니다.

"일주일을 기다려 고른 게 겨우 라면이네요."

상인이 웃으며 건넨 말에, 노인은 잠시 멈칫했습니다.

"점심때는 집으로 가면 돼. 요우해라."

대답은 짧았지만, 그 안에는 혼자 차려 먹는 밥상의 풍경이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라면은 반찬을 만들 힘이 없는 날, 가장 손쉬운 선택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이런 장면을 그냥 지나칩니다. 라면 몇 봉지를 사는 노인의 뒷모습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뒷모습이 향한 곳은, 한때 대가족이 북적였던 집이었습니다.

* * *

된장찌개를 끓여줄 사람이 없는 부엌

그 집 마당에는 오래된 장독대가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뚜껑 위에는 먼지가 얇게 앉아 있었고, 부엌 창문 안쪽은 불이 꺼져 있었습니다.

2년 전, 아내가 치매 진단을 받고 요양병원으로 떠났습니다. 그날 이후 이 부엌에는 한동안 불이 켜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어떻게 그 사람이 그래 가지고."

남자는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서울에 있을 때도 한강다리 건너가면서 전화해서, 된장찌개 끓여놔라 그랬어. 집에 가서 먹으면 피로가 싹 풀리고."

그 말 끝에 남자는 잠시 숟가락을 내려놓았습니다. 왜 어떤 냄새는 사람이 떠난 뒤에도 방 안에 오래 남는 것일까요. 아마 그것은 냄새가 아니라, 그 냄새를 맡던 시절 전체가 남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는 게 뭘까, 라는 말을 남자는 혼잣말처럼 흘렸습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 * *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 트럭이 대문 앞까지 갑니다

그날의 마지막 집은 마을 안쪽 골목 끝에 있었습니다. 상인은 트럭을 세우지 않고, 대신 물건을 챙겨 직접 걸어 들어갔습니다.

좁은 골목 안, 낡은 슬레이트 지붕 아래 문이 반쯤 열려 있었습니다. 안쪽에서 인기척이 났고, 느린 걸음 소리가 이어졌습니다.

"어머니, 저 왔어요."

"아, 네. 안녕하세요."

노모는 문지방을 짚고 서서야 겨우 몸을 지탱했습니다. 상인은 봉지 하나를 건네며 말했습니다.

"오늘 밥도 왔는데 떡도 가져왔어요. 잘 드세요."

손님이 트럭까지 올 수 없다면, 트럭이 손님에게 가면 된다는 것. 그 단순한 셈법 하나가 이 골목까지 사람을 걷게 만들었습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문 앞까지 와주는 걸음 하나에 그렇게 고마워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 걸음이, 하루 중 유일하게 자신을 찾아온 발소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 * *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라는 밭

지리산을 등지고 앉은 밭에는 콩과 고추, 감자와 팥이 나란히 심겨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매일 같은 시간에 밭으로 올라갔습니다.

"자주 뒤보고 잘 거두면 잘 되고, 내버려두면 안 열려. 사람 발자국 소리 듣고 크는 거야."

눈을 뜨면 일이었고, 눈을 감으면 밤이었습니다. 여행 한 번 다녀오지 않고 땅만 보며 지나온 세월이었습니다. 그 세월은 화려한 말 대신, 잘 여문 콩깍지 하나로 조용히 증명되고 있었습니다.

* * *

돌아오는 길, 트럭은 비어 있었습니다

하루 일과를 마친 트럭 짐칸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상인은 그 빈 짐칸을 보며 웃었습니다.

"한평생 살면서 이렇게 어머니들이 저를 이렇게 많이 기다려 주겠어요."

계산해보면 남는 것 없는 하루였습니다. 그런데도 트럭은 다음 주, 같은 요일에 다시 같은 산길을 오를 예정이었습니다.

산 그림자가 길게 내려앉을 무렵, 트럭 엔진 소리가 마을을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다음 주 이 시간이면, 또 같은 자리에 대문이 열릴 것입니다.

세상은 어쩌면 이런 작고 소박한 걸음들로 굴러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왜 어떤 마을에는 트럭 한 대가 그렇게 큰 존재가 되는 것일까요.
가게까지 걸어갈 힘이 없는 사람에게는, 정해진 요일에 오는 발소리 하나가 하루 전체를 기다리게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된장찌개 하나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왜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요.
음식은 결국 그 음식을 끓여주던 사람과 함께 기억되기 때문에, 사람이 떠난 자리에서 냄새만 오래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매주 같은 길을 도는 일이 힘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계산으로는 남는 게 없어도, 문을 열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하나로 다음 주를 다시 나서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참고: KBS 다큐멘터리 3일, 2026.06.29 방송분 "가는 날이 장날" 방영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에세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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